
공지사항
경주남산의 아름다움(경북포럼 기조강연)
Author
경주남산연구소
Date
2025-06-2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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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의 아름다움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1. 남산 이야기
남산은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 분지의 남쪽에 위치하며, 일찍부터 남산이라 불러왔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감싸고 있는 중요한 산으로, 북의 금오봉(468m)과 남의 고위봉(494m)을 중심으로 동서 4km, 남북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가 많아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만물상을 이루는, 작지만 신성한 산이다.
남산에는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의 시작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서린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특히 남산은 신라가 나라를 세운 성지(聖地)로,** 시조 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신 나정이 있고, 최초의 궁실이 있었으며, 시조왕릉이 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였으며, 불교적 신앙과 정신세계가 남산 곳곳에 남아있다.
60여 곳의 계곡에는 선사시대 유적부터 신라의 건국 유적, 산성, 왕릉, 절터, 석탑, 불상 등 다양한 불교 유적이 남아 있어,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종교적 신념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남산은 역사적·문화적 가치로 인해 1968년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고, 지난 4월 17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
*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삼국유사』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삼국유사』 기이제2 [태종춘추공]
王之代有閼川公 林宗公 述宗公 虎林公<慈藏之父> 廉長公 庾信公 會于南山亐知巖 議國事. 『삼국유사』 기이제2 [진덕왕]
眞平王 九年 秋七月 …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眞平王 十三年 …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삼국사기』 신라본기 [眞平王]
文武王 三年 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文武王 十二年 春正月 …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文武王 十九年 增築南山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敬順王立 …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 『삼국사기』 신라본기 [敬順王}
… 又新月城南有南山城 … 『삼국사기』 雜志 第三 地理一
崔致遠 … 嘯詠風月 若慶州南山 … 『삼국사기』 列傳 第六
**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탄강지 나정이 있고, 최초의 궁실이 있었으며, [진덕왕]조에는 신라 사령지 중 우지암이 있었다 하고, [문호왕법민]조에서는 통일된 왕국의 위세 건물인 장창이 있었다 하며, 『삼국사기』 <제사>조에서는 신성의 북문에서 중농을 제사하고, 납월 해일에는 팔자를 제사지낸다고 하여, 남산이 국가적인 성소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2. 남산의 유적조사
경주의 유적은 1902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사로 처음 소개 되었으나, 당시에는 남산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6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를 보완하여 경주의 유적에 대한 대략적인 전모를 밝히기는 하였으나, 남산에 대해서는 남산성과 일부 절터, 탑만 소개하는 데 그쳤다.
1909년 세키노의 경주 일원 재조사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조사로 남산 기슭의 유적이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고, 장골호(葬骨壺)와 남산신성 부근에서 석기와 토기가 발견되면서 남산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910년 이후에는 고분, 절터, 건물지 등에서 출토된 옛 기와 수집이 성행하게 되면서, 남산 기슭의 폐탑과 초석들도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계곡에 있던 마애불도 일부 알려지게 되었다. 1916년 발간된 모로가 히데오(諸鹿英雄)의 『新羅寺蹟考』에 약 20개소의 사지(寺址)가 남산 전역에 있다고 소개된 것은 당시 경주 사람들의 남산에 대한 견문을 눈뜨게 한 것을 말해주며, 산기슭의 고분군, 산위의 석기시대 유적, 계곡 마다 숨겨진 불상, 석탑, 석등의 뛰어남을 점차 알게 되었다.*
특히 1911년 세키노의 조사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이, 1915년 경주를 떠나 경복궁 내 조선물산공진회장에 지어진 미술관에 전시되면서** 남산의 불교유적은 그 중요성을 더해 갔다.
1923년 가을에는 조선총독부가 배리 석조여래삼존석불을 발굴조사하고 복원하였으며, 1925년에는 총독부 박물관이 남산 전체를 일주일 동안 약측(略測) 조사하여 유적의 개요를 파악하고 사진 촬영을 실시하였다. 이후 1927년부터 1928년까지는 총독부 박물관이 1/5,000 축척의 유적 배치도를 제작하여 남산 유적의 전체 구성을 기록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1932년에는 조선고적연구회의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와 경성제국대학의 이마세키 미츠오(今關光夫)가 불교유적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유적의 위치를 명확히 할 수 있었고, 이후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모로가, 와따리 후미야(渡理文哉) 등의 현장조사,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등의 답사 등을 통해 남산 전역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후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는 1926년부터 여러 차례의 답사를 시도하여 유적과 유물을 실측하고 소규모 발굴도 실시했으며, 1940년에는 남산 전체를 아우르는 조사보고서 『慶州南山の佛蹟』을 간행하였다.
해방이후에는 한동안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나,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의하여 1972∼1973년 남산지구 유적 종합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경렬 선생이 7여 년간 남산의 유적을 조사하여 절터 106곳, 불상 78체, 석탑 61기, 기타 67점 등 총 320점에 달하는 유적·유물을 확인하여, 1979년 『경주남산고적순례』를 발간하여 남산의 문화유산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이 책은 경주시에서 한정본으로 출간되어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1993년 불지사에서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으로 수정·보완되어 재출간 되면서, “딱딱한 조사보고서류나 논문·사진집들에 ‘문화적·인간적 정취’를 불러 넣어주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에는 열화당에서 강운구 선생이 사진을 촬영하고, 김원룡 선생(「남산 불적의 미」), 강우방 선생(「경주남산론」)이 글을 기고한 『경주남산-신라정토의 불상』이 출간되어 남산의 아름다움을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88년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김길웅 선생이 탑곡마애불상군을 탑본하고 실측조사를 진행하였으며, 1989년에는 동국대학교 한국미술사연구소 문명대 선생이 42개소의 불상을 실측 조사하여 학술적으로 큰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도 남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문화재연구소는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7기의 탑 및 탑재를 조사하였고, 계속하여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동남산 지역의 절터 38개소를 조사하고,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서남산 일대 16계곡에서 87곳의 크고 작은 절터와 불상 32체를 조사 확인하였다. 그 결과,
1992년 『경주남산의 불교유적-탑 및 탑재조사보고서』
1997년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
1998년 서남산의 절터 6개소를 포함하여 21계곡 44개소의 절터를 수록하여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Ⅲ-동남산 사지조사보고서』를 간행하였다.******
1995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경주남산 특별전]을 개최하여,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7년부터는 남산 일원에 대한 보존 및 정비방안의 수립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남산 전체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문화재관리국과 경주시·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하여 세부적인 정비계획안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남산의 개별 유적·유물에 대한 정비구역의 설정과 보존·보수·복원계획의 수립, 사적지 지정구역 재조정, 단위 문화재의 환경보존의 타당성, 분묘에 대한 대응책, 순례길과 관광도로, 안내판과 이정표, 전시관의 건립 등 종합적인 검토작업과 유적보존·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등이 이 기간 동안 이루어 졌다.******* 그 결과로
2000년 『경주남산(도판편)』,********
2002년 『경주남산(본문·해설편)』,
2003년 『경주남산 종합정비 기본계획』,
2004년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와 『석조문화재 정밀실측보고서』 등이 간행되었다.
위와 같이 공적기관의 남산 조사 사업이 전개되는 중 남산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민간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 朝鮮總督府, 『慶州南山の佛蹟』 1940.(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223p)
** 아라키 준, 「일제강점기 경주남산 초기 불적조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 이 불상이 박물관에 옮겨질 때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의 아랫부분이 결실된 채 옮겨졌고, 머리는 1952년 비파마을 농가에서 박일훈 관장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고, 1975년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 朝鮮總督府, 『慶州南山の佛蹟』 1940.(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223p)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8p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 1998.
이명옥,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 남산」.(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13P.
******** 도판편이 먼저 발간된 것은, 2000년 11월 호주 케언즈에서 개최될 유네스코 회원국 전체회의의 중요성을 인식,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선 사진집을 발간하여 세계유산 등록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 결과 남산을 포함한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은 큰 성과였다.
********* 남산의 보존 및 홍보활동을 전개한 널리 알려진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① 신라문화동인회(1956년 창립)
② 부처님마을(1984년 창립)
③ 경주남산성역화 결사대회(1989년 창립)
④ 남산사랑모임(1992년 창립)
⑤ 신라문화원(1993년 개원)
⑥ 경주남산 세계유산등록 촉구를 위한 시민모임(활동 기간 1998∼2001년)
⑦ 경주남산연구소(1999년 창립)
3. 남산의 문화유적
1) 선사 유적과 유물
남산과 주변에서는 아직 선사유적과 관련된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왕정곡 월정교 남쪽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편과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또한 용장계곡 입구와 국사곡 입구 등지에서는 지석묘가 확인되었으며, 대마곡·용산곡·비파곡·금오산 정상부근에서는 무문토기편이, 장창곡·식혜곡·선방곡·입곡·천룡사지 등에서 돌도끼가, 오산계에서는 돌화살이, 삼릉곡에서는 돌칼이, 선방곡에서는 반달형 돌칼이, 황금대에서는 숫돌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중심의 선사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발 400m 이상인 금오산 정상부근에서 무문토기편과 석기들이 수습됨에 따라 선사시대의 생활 영역이 높은 지대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산성
남산에는 모두 4개소의 산성이 확인되고 있다.
도당토성과 남산토성은 고신라기의 토성이며,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591)년에 축조된 석성이며, 고허산성은 진평왕 48년(626)에 쌓았다.
이들 산성의 기능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도당산에서는 초기 신라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고 전해지며,* 남산신성에는 문무왕 3년(663)에 곡식과 병기를 저장하는 장창(長倉)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진평왕 13년에 쌓은 남산신성은 공사 시 건립한 비(碑) 10기가 발견되어 사료의 신빙성과 아울러 그 당시 신라의 지방통치제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3) 왕릉과 고분
남산 기슭에는 13기의 신라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의 오릉에는 시조 혁거세왕릉과 시조왕비릉,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이 있으며, 서쪽 산기슭에는 7대 일성왕릉, 6대 지마왕릉과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과 독릉으로 불려지는 55대 경애왕릉 등 박씨 11왕릉이 있으며, 동쪽 기슭에는 49대 헌강왕과 50대 정강왕의 김씨 왕릉이 있다.
시조왕릉은 조선 초기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으며, 다른 왕릉들은 18세기 초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오릉은 4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되고,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은 왕릉 전승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구조도 통일기에 나타나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덕왕은 화장 후 잠현의 남쪽에 장골(藏骨) 또는 죽성에 장사지냈고,*** 경명왕은 화장 후 성등잉산에서 산골(散骨) 또는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한다.****
남산에서 왕릉을 제외한 고분에 대한 조사는 매우 빈약하여 전체적인 현황을 알기는 어렵지만, 남산 전 지역의 능선과 골짜기에서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고분은 대부분 봉분이 유실되고 훼손이 심하여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4) 절터[寺址]
남산에는 지금까지 15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되고 있으나, 문헌 기록상 또는 수습된 유물에서 확인되는 사찰명은 23개소이다.
남산지사(南山之寺), 도중사(道衆寺), 생의사(生義寺), 문수사(文殊寺), 불무사(佛無寺),
석가사(釋迦寺), 천룡사(天龍寺), 피리사(避里寺 : 염불사 念佛寺), 양피사(讓避寺),
남간사(南澗寺), 창림사(昌林寺), 천은사(天恩寺), 용장사(茸長寺), 선방사(禪房寺),
신인사(神印寺), 사제사(四祭寺). 천관사(天官寺), 기원사(祇園寺), 실제사(實際寺),
금광사(金光寺), 보리사(菩提寺), 담엄사(曇嚴寺), 개선사(開善寺).
이 가운데 천룡사만 근대에 들어 다시 법통을 이어가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폐사되었거나, 절터를 확인할 수 없으며, 절터가 확인된 곳은 14개소이다.
남산의 사찰 중 7세기에 조성된 사찰로서는 불곡 마애여래좌상의 절터와, 장창곡 석조여래미륵삼존상 출토지, 선방사 등이며, 대부분 8세기 이후의 사찰들이고, 산의 북쪽과 산기슭에서 사찰이 분포하기 시작하다가, 점차 산 정상부와 남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남산의 절들은 크게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 자연환경을 이용한 좁은 터에 석축을 쌓아 능선과 계곡에 평지를 조성하여 불전을 마련한 것이며, 규모면에서 암자 정도의 사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천룡사지, 창림사지, 남간사지, 신인사지, 용장사지, 천관사지, 인왕동사지 등 대규모 사원들도 여러 곳이 있다.
이들 중 쌍탑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은 창림사지, 인왕동사지, 전 염불사지, 기암곡 2사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산지가람의 경우 단탑 가람은 대부분 망탑(望塔) 형식으로 절터 내 또는 주변에서 높은 곳에 축조되기도 하며, 탑이 없는 가람이 상당수 조영된 것으로 보여 진다.
5) 불상
남산은 양질의 화강암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7세기 초부터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8∼9세기를 지나면서 불상의 양식은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였다.
60여 곳의 골짜기 속에 150여 곳의 사찰이 조영되면서 주변의 바위는 환조, 부조, 선각 등 다양한 형태의 불보살상이 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117구의 불상이 확인되었고, 소형불상과 금동불 12구를 포함하면 남산의 불상은 129구에 이른다. 이렇듯 불보살상으로 가득한 남산은 신라인들이 꿈꿨던 불국정토 그 자체이다.
남산에서 불상이 가장 먼저 조성된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7세기 대에 조성된 불상은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머리가 큰 어린아이의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데,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 그 대표적인 불상이다.
남산에서도 통일 이후에는 새로운 불상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시작은 봉화골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본존불은 석가모니의 성도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을 결(結)하고, 편단우견의 법의를 입었으며, 결가부좌한 양다리 사이의 옷자락을 부챗살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형식들은 8세기 중엽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남산에서는 총 18구******의 촉지인 여래좌상이 확인되는데 주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촉지인 불상의 법의는 편단우견과 통견의 법의를 착의하기도 하며, 왼쪽 어깨 위에 가사 끈 장식을 하는 등 표현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대좌도 향로와 비천으로 장엄한 8각형의 대좌와 사천왕상이 새겨진 방형대좌도 있어 석굴암 불상의 정형에서 벗어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9세기 불상의 새로운 양상은 대형화된 마애불의 조성에 있다. 이 시기 남산에는 8.6m에 이르는 약수곡 마애여래입상과 6m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과 5.6m에 이르는 최근 발견된 새갓골(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사면에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비천·승려·사자·탑·나무 등을 표현한 높이 10m에 이르는 탑곡마애불상군은 남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이 시대에 일반적으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은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2구뿐이다.
남산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은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많은 석조 불상들은 머리가 잘리고 파괴되는 수난을 당해 완전하게 보전된 환조불상은 거의 없으며, 마애불에서 몇몇 완전한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애불상이 파괴 되지 않은 것은 바위의 단단함으로 파괴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오랜 바위신앙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파괴보다 바위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로 파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산의 시대별 대표적인 불상은 다음과 같다.
① 고신라 : 불곡 마애여래좌상,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인왕동출토 석조여래좌상,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용장계 출토 석조 불두, 포석계 상사바위 석불입상.
② 통일 전성기 : 칠불암 마애불상군, 입곡 석불두,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③ 통일 후기 :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마애입불상,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용장계 사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침식곡 석조여래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 부엉곡 마애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개선사지 약사여래입상, 창림사지출토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구,
6) 탑파
남산에서는 목탑 1기와 석탑 92기 및 마애탑·천동탑·청동소탑 등 모두 99기에 이르는 탑이 확인되어 당시 신라인들이 남산을 불국토로 생각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평지와 봉우리 곳곳에 탑을 세워 산 전체를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19기만이 제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나,******** 계곡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탑 부재들은 8세기의 전형양식을 시작으로 9세기의 변화된 양식, 그리고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중의 기단과 2개의 탱주가 있고 5단의 옥개 받침 등으로 특정 짓는 8세기의 전형양식은 12기이며, 대부분 계곡의 입구 평지에 그 유적들이 남아있다.
전형양식에서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는 9세기의 탑은 70여기가 확인된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자연암반의 기단화는 이 시기 탑 기단부에서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양식은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처럼 괴체형의 기단이 출현되고,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탑곡 삼층석탑, 천룡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등의 단층기단으로 변화되어 간다.
남산동 동 삼층석탑과 용장계 지곡 모전석탑은 모전석탑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며, 창림사지 삼층석탑과 남산동 서 삼층석탑은 상층기단면석에 팔부중상을 배치한 형식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좋은 작품이다.
7) 기타 유물과 유적
남산에는 불교유적과 고고유적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유적·유물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시조 탄강지 나정, 서출지, 월정교와 일정교의 교량지,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지, 최치원의 유허인 상서장, 조선시대 이후의 건축물인 숭덕전, 이요당, 용산서원, 월암종택,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인 매월당사지(梅月堂祠址), 봉수대 및 각종 비석 등이 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255p.
**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삼국유사』 기이 제2 文虎王法敏.
*** 第五十三 神德王 … 火葬 藏骨于箴峴南. 『삼국유사』 [왕력]
王夢 諡曰神德 葬于竹城. 『삼국사기』[신라본기]<신덕왕>
**** 第五十四 景明王 … 火葬皇福寺 散骨于省等仍山西. 『삼국유사』 [왕력]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北. 『삼국사기』[신라본기]<경명왕>
***** 경상북도.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9(신라의 조각과 회화).2016. 133p
****** 칠불암 마애불상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제1사지 석조여래좌상,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중앙박물관),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좌우 수인이 바뀌어 있다.), 용장계 사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침식곡 석조여래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 2구, 부엉곡 마애여래좌상, 용장계 법당골 석조약사여래좌상(경주박물관), 배실 석조여래좌상(경주박물관), 냉골 석조약사여래좌상(파불),
*******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과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부엉곡 마애여래좌상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해야 될 여지가 있다.
******** 용장사곡 삼층석탑,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삼릉계제6사지 삼층석탑(경주박물관), 승소곡 삼층석탑(경주박물관), 창림사지 삼층석탑, 탑곡 삼층석탑, 천룡사지 삼층석탑, 보리사 삼층석탑,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용장계 지곡 모전석탑,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기암곡제2사지 동 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전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천관사지 삼층석탑.(복원 정비 순)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55p
4. 유물 유적의 발견과 복원
남산의 유물 유적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선방곡 불당지(佛堂址)에 넘어지고, 엎드려져 있던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을 조사하고 일으켜 세워 정비하였고,* 그해 삼릉계에 목이 결실된 환조(丸彫)의 석불이 앞으로 넘어져 있었고, 광배는 뒤쪽에 떨어져 있었으며, 머리 부분은 훨씬 아래쪽에 떨어져 참담하게 파괴되어 있던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복원한 것이 남산 유적 복원의 시작이었다.**
1922년 용장사 삼층석탑이 도굴범들에 의해 도괴되고, 1923년 삼층연대승형석상도 도굴범들에 의해 도괴된 것을 1924년 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복원하였으며,*** 1935년에는 승소곡 절터에 무너져 흩어져 있던 승소곡 삼층석탑을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해방 이후 발견된 탑과 불상은 다음과 같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 이장수, 이원명에 의해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발견
1979년 시민 오영조에 의해 약수곡 마애입불상의 왼발 찾아 냄.
1988년 시민 김헌덕과 일행에 의해 냉곡 암봉 선각마애여래좌상 발견
1994년 신라문화동인회에 의해 삼릉계 1사지와 폐석조여래입상 발견
1999년 남산 문화유적 전수 조사시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2005년 시민 문종철에 의해 지암곡 선각마애여래입상 발견
2005년 시민 임희숙에 의해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의 머리 발견
2007년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복원과정에서 조사원 박소희에 의해 마애여래입상 발견
2013년 시민 이진락에 의해 헌강 정강왕릉 호석 갑석 발견
2018년 시민 배중선에 의해 국사곡 석탑 갑석 발견
2020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발굴조사로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머리 발견
해방이후 탑과 불상이 발견되면서 탑과 불상의 복원도 큰 성과가 있었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머리와 광배 일부분이 없는 채로 정원에 안치되어 있던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정양모 관장에 의해 머리를 찾게 되어 새로운 박물관으로 이전할 때는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는 큰 경사가 있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1977년 탑곡 삼층석탑이 복원되고, 1979년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복원되었으며, 불교신도들에 의하여 1991년 천룡사지 삼층석탑이 복원되고, 1993년 보리사 삼층석탑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1998년부터 시작된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어 남산의 문화유산이 전수 조사되어, 2002년에 4기, 2003년에 3기, 도합 7기의 탑을 복원한 것은 큰 성과였다.
이로부터 발견되고 복원된 탑과 불상은 다음과 같다.
2002년 용장계지곡 모전석탑,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2003년 기암곡제2사지 동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2008년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복원
2008년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복원
2009년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복원
2025년 헌강 정강왕릉 갑석 및 호석 복원
이들 새로운 유물·유적의 발견은 공공기관의 조사 시 발견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시민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98∼2002년까지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어 구체적인 조사와 정비 계획을 수립할 때도 남산을 잘 알고 있던 향토 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2월부터 [경주남산 세계유산 등재 촉구를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자극을 받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문화재관리국에서 남산의 세계유산 등록을 적극 추진하게 되어 남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으며, 2002년과 2003년에 복원된 7기의 석탑에는 경주 문화시민들의 발원으로 법사리(불상, 필사본 경전, 불화, 향목, 발원문 등의 불구)를 봉안하게 된 것도 큰 성과였으며, 또한 2009년 복원된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천룡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토지매입 조차 어려워 발굴 할 수도 없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큰 성과였다. 이 탑은 복원 당시 한국·스리랑카 불교복지협회의 주선으로 스리랑카 종교부장관과 국회의원(승려)이 친히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봉안하는, 전설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방 이후 불상과 석탑의 조사와 발견, 복원에는 시민들의 공로가 지대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관심과 참여가 더욱 활발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 『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44∼245p)
** 『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48p)
*** 『慶州南山の佛蹟』 에 의하면, 삼층석탑은 1922년 도괴되었고, 1923년 가을 복원되었으며, 삼층연화대승형석상은 1923년 봄에 도괴되었고, 그해 가을에 삼층석탑과 함께 다시 세웠다고 하였으나,(『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60∼261p)), 현장의 명문에는 [三層石塔大正十一年 爲益所倒壞 三層佛塔大正十二年春 爲益所倒壞 小石塔殘部 右大正十三年春再建 朝鮮總督府]로 되어있어, 삼층석탑은 1922년 도괴, 삼륜대좌불은 1923년 도괴, 1924년 봄 복원으로 정리하였다.
5. 남산의 신성성과 아름다움(자연과 어우러진 성지로서의 남산)
남산의 유물 유적의 아름다움은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 편평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반반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조성하고, 높은 봉에는 탑을 세웠다. 절을 세우기 위하여 산을 깎고 골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바위 속에 부처가 머물고 있다고 신앙되어도 바위가 조각을 하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신앙하였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남산은 신들이 머무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남산이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성스러운 분이 본래부터 성스러운 땅을 찾아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남산은 태초부터 성스러운 땅이었다.
또한, 남산신성의 북문에서 1년에 2번이나 농사에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남산신성의 장창이 통일된 왕국의 위세건물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남산이 성소라는 증좌이다.**
남산의 유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속, 바위 속에는 신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곳으로 신앙되었다. 이러한 예는 삼국유사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비파바위의 부처님이 망덕사의 낙성재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행색이 초라한 거사의 모습으로 광주리에 마른 생선을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경흥국사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스님은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린 후 경덕왕에게 「안민가」를 지어 올려 군신과 백성들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 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꾸짖고 가르침을 주시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타나서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를 이루었다.
남산에는 마애불이 많다. 마애불의 시원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처님은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께서는 결가부좌하고 석벽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멀리서 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과 법현의 『불국기』,****** 송운의 『송운행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실려 있다.
또한, 마애불 조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래(古來)로 바위를 영물로 여기는 산악숭배신앙이 보편화되어 왔는데, 그러한 관념은 마애불의 활발한 조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토로 생각하였으며, 이곳에 수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있어 동시에 솟아나시”********는 곳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윤경렬 선생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후로 남산은 하늘에서 하강하신 부처님들이 머무시는 곳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이 생기고 탑이 서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하였고, 김원룡 선생은 “남산의 석불들을 총관해서 그들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은 부처와 자연과의 신묘한 조화에서 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친밀감이라 하겠다. 바위들이 남산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에 부처도 산의 한 요소로 되어 버린다. 산과 바위와 부처 사이에는 조금도 이질감이 없다. 부처는 산기(山氣)의 구형(具刑)처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산과 함께 시간의 흐름 밖에 서 있다.”**********고 하였으며, 강우방 선생은 “남산에는 불신(佛身)이 편만(遍滿)해 있다. 불신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법계를 남산은 보여주고 있다. 신라인들은 그러한 궁극적인 불교의 진리를 이 남산에 실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문명대 선생은 “남산의 불상들은 바위에 새기고 바위를 쪼아 부처님을 조성하면서 경쟁적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던 것은 남산 전체를 신라 최고의 영험도량으로 인식하였던 신라인들의 의식 때문이었다. 산 전체가 영험도량 이었으므로 산과 부처님, 탑과 산이 혼연일체로 조화되게 배려하고 있다. 부처님과 산이 하나로 융화되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부처님으로 그들의 의식 깊숙이서 부터 생각했다.”************고 하였다.
남산은 불상과 탑, 바위, 나무들이 어우러진 불국토를 이루었다. 남산에서 널리 알려진 자연과 어우러진 탑상들은 다음과 같다.
① 불곡 마애여래좌상 - 석굴 사원의 시원양식이며, 석실 속에서 편안히 쉬는 듯한 할머니 같은 인자한 모습.
②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 삼륜대좌로 된 특이한 모습의 8세기 조각으로 하대석은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으므로 바위산(수미산)에서 솟은 듯 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③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절벽 위의 바위에 조성된 미륵보살상으로, 구름 위에 유희좌로 앉아 오른손에는 용화수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설법인을 하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시는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④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 8세기 후반의 불상으로 하대석에 연화대를 생략하고 거칠게 조각함으로서 바위 능선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입상 - 9세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으로, 광배 등 일부 조각을 생략함으로써 하늘에서 하강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⑥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선각으로 조성되어 바위와 잘 어우러져 벽화 같은 9세기에 조성된 조각이다.
⑦ 보리사 마애석불 - 예참조차 어려운 가파른 비탈에 노천불로 조성되어, 서라벌을 굽어보는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다.
⑧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 9세기에 거대한 바위를 불신(佛身)으로 삼아 조성한 마애불이다.
⑨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9세기에 조성된 마애불로, 머리는 고부조로 깊이 있게 조각하여 입체감을 강조하고, 편평한 신체에는 옷 주름과 손·발 등을 거친 선각으로 표현하여 마치 바위에서 돌출하는 듯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⑩ 용장사곡 삼층석탑 - 산 능선의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세운 석탑으로,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산봉우리의 거대한 바위 위에 솟아 수미산처럼 보인다. 남산의 망탑 가운데서 그 아름다움이 으뜸이다.
⑪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 산 중턱 바위 위에 세워진 단층기단의 삼층석탑으로, 망탑의 성격을 지닌 삼층석탑이다.
⑫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 기단을 거칠게 치석한 망탑으로 가암들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며, 들판에서 올려보면 바위산에서 솟아 오른 모습의 탑이다.
⑬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 다듬지 않은 바위를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이다.
⑭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 바위 봉우리를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으로 서라벌이 굽어보인다.
⑮ 삼릉계제6사지 삼층석탑 - 바위 지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 형식의 삼층석탑이다.
* 十二月寅日 新城北門祭八䄍 豊年用大牢 凶年用小牢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祭中農 立秋後亥日 䔉園祭後農. 『삼국사기』 잡지 제사.
**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삼국유사』 기이 제2 文虎王法敏.
장창의 용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군량미와 병기를 저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규모나 출토되는 유물(와당 등)과 위치상 군사시설이 될 수 없다. 이는 통일된 왕국의 위세 건물로 봄이 타당하다. 또한 혜공왕 4년(768) 각간 대공의 반란 중 신성의 장창이 불에 탓다는 기록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삼국유사』 감통제7 眞身受供
**** 『삼국유사』 감통제7 憬興遇聖
***** 『삼국유사』 기이제2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연되는 곳에 석실이 있는데, 산을 뚫어서 남서로 방향을 틀고 자리 잡고서 붓다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10여 보 물러서서 바라보면 붓다의 진짜 형상을 보는 것과 같고 금색상호는 빛나며 뚜렷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점점 희미해지나 그래도 그림자는 있는 것 같다. 여러 곳의 왕들은 각기 그림쟁이를 보내서 묘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림자의 실물과 같이 그릴 수는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전하기를 “천불은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긴다.”고 한다.
那竭城南半由延有石室博山 西南向佛留影 此中去十餘步觀之如佛眞形 金色相好光明炳著 轉近轉微髣髴如有 諸方國王遣工畫師摹寫莫能及 彼國人傳云 千佛盡當於此留影. 『佛國記』 김규현, 글로벌콘텐츠. 2013. p77∼78, p187.
******* 이태호. 「한국마애불의 유형과 변모」. 불교문화연구7. 2000.
******** 佛說是時 娑婆世界 三千大千國土 地皆震裂 而於其中 有無量千萬億 菩薩摩訶薩 同時湧出 是諸菩薩 身皆金色 三十二相 無量光明 先盡在此 娑婆世界之下 此界虛空中住. 『묘법연화경』 從地湧出品 第十五
부처님께옵서 이렇게 설하실 때에 사바세계와 삼천대천국토는 땅이 다 진동하고 벌어지나니, 그 가운데서 헤아릴 수도 없는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있어 동시에 솟아나시니라. 이 모든 보살의 몸은 다 금색이시고 삼십이상이며 무량한 광명이라 먼저 다 이 사바세계 아래 이 세계의 허공중에 머물러 있나니.
********* 윤경렬.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 불지사. 1993. 21p.
********** 열화당. 『慶州南山-新羅淨土의 佛像』. 1987. 18p
*********** 열화당. 『慶州南山-新羅淨土의 佛像』. 1987. 196p
************ 문명대. 『慶州南山佛像實測調査硏究』. 한국미술사연구소. 1989.
6. 마무리
남산은 단순한 자연 경관을 넘어, 신라 왕실과 백성들이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성스러운 터전이었다. 이 곳에 남겨진 다양한 불교 유적들은 신라인들의 신앙과 세계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인들은 불국토 사상을 바탕으로 남산을 신성한 공간으로 가꾸었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남산의 유적들은 신라의 정신세계와 문화적 성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신라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산은 단순한 역사적 장소를 넘어, 신라 불교의 정수가 깃든 신성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산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별 문화유산과 미술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앞으로는 신앙 차원의 연구와 함께, 신라인들이 남산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심화된 고찰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남산의 유적과 유물은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복원되어야 한다. 남산의 문화유산은 본래의 자리에서 자연과 어우러질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일찍이 『慶州南山の佛蹟』을 집필한 오바 쓰네키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이후 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된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본래 위치를 벗어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반드시 원위치로 돌아와야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이처럼 남산을 떠난 수많은 문화유산은 하루 빨리 남산으로 돌아와야 하며, 돌아오기가 어렵다면 현장에서 옛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산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 그리고 새로운 유산의 발견 등은 국가기관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남산의 보전 및 조사와 유물의 발견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큰 성과를 이룬 것처럼, 앞으로도 시민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 드립니다.
* 이 석불과 같이 낭떠러지에 몸을 의지하고 겨우 올라가는 절벽사이의 좁은 곳에 큰 바위를 파고 깎아 교묘하게 거대한 불상을 만들고, 매일 예배한 신라인의 신앙을 단순히 불교를 숭배한 것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佛殿佛像 제작은 본래 미술품으로서 만들고 또한 조각한 것이 아니고 심오한 佛敎敎儀의 표현으로서 특별히 산 속에 깨끗한 곳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 불상도 현재와 같이 박물관의 한 미술품으로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원위치의 환경과 서로 어울림에 의해 비로소 중요한 뜻과 靈威를 내포하는 것으로 남산 계곡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51p)
참고문헌
『묘법연화경』
『삼국사기』
『삼국유사』
『불국기』
조선총독부.『慶州南山の佛蹟』. 1940.
열화당. 『경주남산-신라정토의 불상』. 1987.
한국미술사연구소. 『경주남산불상실측조사연구』.1989.
윤경렬.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 불지사. 1993.
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경주남산』.199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탑 및 탑재 조사보고서』.199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199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Ⅲ-동남산 사지조사보고서』.199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도판편』. 2000.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경주시. 『경주 남산신성』. 2010.
경상북도.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9(신라의 조각과 회화). 2016. 122∼153p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2025. 6. 13.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1. 남산 이야기
남산은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 분지의 남쪽에 위치하며, 일찍부터 남산이라 불러왔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감싸고 있는 중요한 산으로, 북의 금오봉(468m)과 남의 고위봉(494m)을 중심으로 동서 4km, 남북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가 많아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만물상을 이루는, 작지만 신성한 산이다.
남산에는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의 시작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서린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특히 남산은 신라가 나라를 세운 성지(聖地)로,** 시조 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신 나정이 있고, 최초의 궁실이 있었으며, 시조왕릉이 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였으며, 불교적 신앙과 정신세계가 남산 곳곳에 남아있다.
60여 곳의 계곡에는 선사시대 유적부터 신라의 건국 유적, 산성, 왕릉, 절터, 석탑, 불상 등 다양한 불교 유적이 남아 있어,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종교적 신념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남산은 역사적·문화적 가치로 인해 1968년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고, 지난 4월 17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
*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삼국유사』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삼국유사』 기이제2 [태종춘추공]
王之代有閼川公 林宗公 述宗公 虎林公<慈藏之父> 廉長公 庾信公 會于南山亐知巖 議國事. 『삼국유사』 기이제2 [진덕왕]
眞平王 九年 秋七月 …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眞平王 十三年 …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삼국사기』 신라본기 [眞平王]
文武王 三年 春正月 作長倉於南山新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文武王 十二年 春正月 …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文武王 十九年 增築南山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文武王]
敬順王立 …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 『삼국사기』 신라본기 [敬順王}
… 又新月城南有南山城 … 『삼국사기』 雜志 第三 地理一
崔致遠 … 嘯詠風月 若慶州南山 … 『삼국사기』 列傳 第六
**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신라시조 혁거세왕의 탄강지 나정이 있고, 최초의 궁실이 있었으며, [진덕왕]조에는 신라 사령지 중 우지암이 있었다 하고, [문호왕법민]조에서는 통일된 왕국의 위세 건물인 장창이 있었다 하며, 『삼국사기』 <제사>조에서는 신성의 북문에서 중농을 제사하고, 납월 해일에는 팔자를 제사지낸다고 하여, 남산이 국가적인 성소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2. 남산의 유적조사
경주의 유적은 1902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조사로 처음 소개 되었으나, 당시에는 남산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6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를 보완하여 경주의 유적에 대한 대략적인 전모를 밝히기는 하였으나, 남산에 대해서는 남산성과 일부 절터, 탑만 소개하는 데 그쳤다.
1909년 세키노의 경주 일원 재조사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조사로 남산 기슭의 유적이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고, 장골호(葬骨壺)와 남산신성 부근에서 석기와 토기가 발견되면서 남산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910년 이후에는 고분, 절터, 건물지 등에서 출토된 옛 기와 수집이 성행하게 되면서, 남산 기슭의 폐탑과 초석들도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계곡에 있던 마애불도 일부 알려지게 되었다. 1916년 발간된 모로가 히데오(諸鹿英雄)의 『新羅寺蹟考』에 약 20개소의 사지(寺址)가 남산 전역에 있다고 소개된 것은 당시 경주 사람들의 남산에 대한 견문을 눈뜨게 한 것을 말해주며, 산기슭의 고분군, 산위의 석기시대 유적, 계곡 마다 숨겨진 불상, 석탑, 석등의 뛰어남을 점차 알게 되었다.*
특히 1911년 세키노의 조사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이, 1915년 경주를 떠나 경복궁 내 조선물산공진회장에 지어진 미술관에 전시되면서** 남산의 불교유적은 그 중요성을 더해 갔다.
1923년 가을에는 조선총독부가 배리 석조여래삼존석불을 발굴조사하고 복원하였으며, 1925년에는 총독부 박물관이 남산 전체를 일주일 동안 약측(略測) 조사하여 유적의 개요를 파악하고 사진 촬영을 실시하였다. 이후 1927년부터 1928년까지는 총독부 박물관이 1/5,000 축척의 유적 배치도를 제작하여 남산 유적의 전체 구성을 기록하였다. 이후 1929년에는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1932년에는 조선고적연구회의 아리미츠 교이치(有光敎一)와 경성제국대학의 이마세키 미츠오(今關光夫)가 불교유적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유적의 위치를 명확히 할 수 있었고, 이후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모로가, 와따리 후미야(渡理文哉) 등의 현장조사,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등의 답사 등을 통해 남산 전역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후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는 1926년부터 여러 차례의 답사를 시도하여 유적과 유물을 실측하고 소규모 발굴도 실시했으며, 1940년에는 남산 전체를 아우르는 조사보고서 『慶州南山の佛蹟』을 간행하였다.
해방이후에는 한동안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갖기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나,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의하여 1972∼1973년 남산지구 유적 종합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경렬 선생이 7여 년간 남산의 유적을 조사하여 절터 106곳, 불상 78체, 석탑 61기, 기타 67점 등 총 320점에 달하는 유적·유물을 확인하여, 1979년 『경주남산고적순례』를 발간하여 남산의 문화유산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이 책은 경주시에서 한정본으로 출간되어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이 책은 1993년 불지사에서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으로 수정·보완되어 재출간 되면서, “딱딱한 조사보고서류나 논문·사진집들에 ‘문화적·인간적 정취’를 불러 넣어주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에는 열화당에서 강운구 선생이 사진을 촬영하고, 김원룡 선생(「남산 불적의 미」), 강우방 선생(「경주남산론」)이 글을 기고한 『경주남산-신라정토의 불상』이 출간되어 남산의 아름다움을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88년에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김길웅 선생이 탑곡마애불상군을 탑본하고 실측조사를 진행하였으며, 1989년에는 동국대학교 한국미술사연구소 문명대 선생이 42개소의 불상을 실측 조사하여 학술적으로 큰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도 남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문화재연구소는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7기의 탑 및 탑재를 조사하였고, 계속하여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동남산 지역의 절터 38개소를 조사하고,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서남산 일대 16계곡에서 87곳의 크고 작은 절터와 불상 32체를 조사 확인하였다. 그 결과,
1992년 『경주남산의 불교유적-탑 및 탑재조사보고서』
1997년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
1998년 서남산의 절터 6개소를 포함하여 21계곡 44개소의 절터를 수록하여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Ⅲ-동남산 사지조사보고서』를 간행하였다.******
1995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경주남산 특별전]을 개최하여,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7년부터는 남산 일원에 대한 보존 및 정비방안의 수립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남산 전체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문화재관리국과 경주시·경주문화재연구소가 협력하여 세부적인 정비계획안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남산의 개별 유적·유물에 대한 정비구역의 설정과 보존·보수·복원계획의 수립, 사적지 지정구역 재조정, 단위 문화재의 환경보존의 타당성, 분묘에 대한 대응책, 순례길과 관광도로, 안내판과 이정표, 전시관의 건립 등 종합적인 검토작업과 유적보존·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등이 이 기간 동안 이루어 졌다.******* 그 결과로
2000년 『경주남산(도판편)』,********
2002년 『경주남산(본문·해설편)』,
2003년 『경주남산 종합정비 기본계획』,
2004년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와 『석조문화재 정밀실측보고서』 등이 간행되었다.
위와 같이 공적기관의 남산 조사 사업이 전개되는 중 남산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한 민간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 朝鮮總督府, 『慶州南山の佛蹟』 1940.(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223p)
** 아라키 준, 「일제강점기 경주남산 초기 불적조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 이 불상이 박물관에 옮겨질 때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의 아랫부분이 결실된 채 옮겨졌고, 머리는 1952년 비파마을 농가에서 박일훈 관장에 의해 발견되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고, 1975년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 朝鮮總督府, 『慶州南山の佛蹟』 1940.(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223p)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8p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 1998.
이명옥,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 남산」.(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13P.
******** 도판편이 먼저 발간된 것은, 2000년 11월 호주 케언즈에서 개최될 유네스코 회원국 전체회의의 중요성을 인식,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선 사진집을 발간하여 세계유산 등록에 도움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 결과 남산을 포함한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은 큰 성과였다.
********* 남산의 보존 및 홍보활동을 전개한 널리 알려진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① 신라문화동인회(1956년 창립)
② 부처님마을(1984년 창립)
③ 경주남산성역화 결사대회(1989년 창립)
④ 남산사랑모임(1992년 창립)
⑤ 신라문화원(1993년 개원)
⑥ 경주남산 세계유산등록 촉구를 위한 시민모임(활동 기간 1998∼2001년)
⑦ 경주남산연구소(1999년 창립)
3. 남산의 문화유적
1) 선사 유적과 유물
남산과 주변에서는 아직 선사유적과 관련된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왕정곡 월정교 남쪽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편과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또한 용장계곡 입구와 국사곡 입구 등지에서는 지석묘가 확인되었으며, 대마곡·용산곡·비파곡·금오산 정상부근에서는 무문토기편이, 장창곡·식혜곡·선방곡·입곡·천룡사지 등에서 돌도끼가, 오산계에서는 돌화살이, 삼릉곡에서는 돌칼이, 선방곡에서는 반달형 돌칼이, 황금대에서는 숫돌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중심의 선사유적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발 400m 이상인 금오산 정상부근에서 무문토기편과 석기들이 수습됨에 따라 선사시대의 생활 영역이 높은 지대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산성
남산에는 모두 4개소의 산성이 확인되고 있다.
도당토성과 남산토성은 고신라기의 토성이며, 남산신성은 진평왕 13년(591)년에 축조된 석성이며, 고허산성은 진평왕 48년(626)에 쌓았다.
이들 산성의 기능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도당산에서는 초기 신라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고 전해지며,* 남산신성에는 문무왕 3년(663)에 곡식과 병기를 저장하는 장창(長倉)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진평왕 13년에 쌓은 남산신성은 공사 시 건립한 비(碑) 10기가 발견되어 사료의 신빙성과 아울러 그 당시 신라의 지방통치제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3) 왕릉과 고분
남산 기슭에는 13기의 신라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의 오릉에는 시조 혁거세왕릉과 시조왕비릉,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이 있으며, 서쪽 산기슭에는 7대 일성왕릉, 6대 지마왕릉과 삼릉(8대 아달라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과 독릉으로 불려지는 55대 경애왕릉 등 박씨 11왕릉이 있으며, 동쪽 기슭에는 49대 헌강왕과 50대 정강왕의 김씨 왕릉이 있다.
시조왕릉은 조선 초기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으며, 다른 왕릉들은 18세기 초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오릉은 4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되고,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은 왕릉 전승기록도 없을 뿐 아니라, 구조도 통일기에 나타나는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덕왕은 화장 후 잠현의 남쪽에 장골(藏骨) 또는 죽성에 장사지냈고,*** 경명왕은 화장 후 성등잉산에서 산골(散骨) 또는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한다.****
남산에서 왕릉을 제외한 고분에 대한 조사는 매우 빈약하여 전체적인 현황을 알기는 어렵지만, 남산 전 지역의 능선과 골짜기에서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고분은 대부분 봉분이 유실되고 훼손이 심하여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
4) 절터[寺址]
남산에는 지금까지 15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되고 있으나, 문헌 기록상 또는 수습된 유물에서 확인되는 사찰명은 23개소이다.
남산지사(南山之寺), 도중사(道衆寺), 생의사(生義寺), 문수사(文殊寺), 불무사(佛無寺),
석가사(釋迦寺), 천룡사(天龍寺), 피리사(避里寺 : 염불사 念佛寺), 양피사(讓避寺),
남간사(南澗寺), 창림사(昌林寺), 천은사(天恩寺), 용장사(茸長寺), 선방사(禪房寺),
신인사(神印寺), 사제사(四祭寺). 천관사(天官寺), 기원사(祇園寺), 실제사(實際寺),
금광사(金光寺), 보리사(菩提寺), 담엄사(曇嚴寺), 개선사(開善寺).
이 가운데 천룡사만 근대에 들어 다시 법통을 이어가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폐사되었거나, 절터를 확인할 수 없으며, 절터가 확인된 곳은 14개소이다.
남산의 사찰 중 7세기에 조성된 사찰로서는 불곡 마애여래좌상의 절터와, 장창곡 석조여래미륵삼존상 출토지, 선방사 등이며, 대부분 8세기 이후의 사찰들이고, 산의 북쪽과 산기슭에서 사찰이 분포하기 시작하다가, 점차 산 정상부와 남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남산의 절들은 크게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대부분 자연환경을 이용한 좁은 터에 석축을 쌓아 능선과 계곡에 평지를 조성하여 불전을 마련한 것이며, 규모면에서 암자 정도의 사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천룡사지, 창림사지, 남간사지, 신인사지, 용장사지, 천관사지, 인왕동사지 등 대규모 사원들도 여러 곳이 있다.
이들 중 쌍탑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은 창림사지, 인왕동사지, 전 염불사지, 기암곡 2사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산지가람의 경우 단탑 가람은 대부분 망탑(望塔) 형식으로 절터 내 또는 주변에서 높은 곳에 축조되기도 하며, 탑이 없는 가람이 상당수 조영된 것으로 보여 진다.
5) 불상
남산은 양질의 화강암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7세기 초부터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8∼9세기를 지나면서 불상의 양식은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였다.
60여 곳의 골짜기 속에 150여 곳의 사찰이 조영되면서 주변의 바위는 환조, 부조, 선각 등 다양한 형태의 불보살상이 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117구의 불상이 확인되었고, 소형불상과 금동불 12구를 포함하면 남산의 불상은 129구에 이른다. 이렇듯 불보살상으로 가득한 남산은 신라인들이 꿈꿨던 불국정토 그 자체이다.
남산에서 불상이 가장 먼저 조성된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을 보여주고 있으며, 7세기 대에 조성된 불상은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 머리가 큰 어린아이의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데,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과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 그 대표적인 불상이다.
남산에서도 통일 이후에는 새로운 불상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시작은 봉화골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다.***** 본존불은 석가모니의 성도 순간을 표현한 항마촉지인을 결(結)하고, 편단우견의 법의를 입었으며, 결가부좌한 양다리 사이의 옷자락을 부챗살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형식들은 8세기 중엽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남산에서는 총 18구******의 촉지인 여래좌상이 확인되는데 주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촉지인 불상의 법의는 편단우견과 통견의 법의를 착의하기도 하며, 왼쪽 어깨 위에 가사 끈 장식을 하는 등 표현에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대좌도 향로와 비천으로 장엄한 8각형의 대좌와 사천왕상이 새겨진 방형대좌도 있어 석굴암 불상의 정형에서 벗어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9세기 불상의 새로운 양상은 대형화된 마애불의 조성에 있다. 이 시기 남산에는 8.6m에 이르는 약수곡 마애여래입상과 6m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과 5.6m에 이르는 최근 발견된 새갓골(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사면에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비천·승려·사자·탑·나무 등을 표현한 높이 10m에 이르는 탑곡마애불상군은 남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이 시대에 일반적으로 조성된 비로자나불상은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2구뿐이다.
남산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은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많은 석조 불상들은 머리가 잘리고 파괴되는 수난을 당해 완전하게 보전된 환조불상은 거의 없으며, 마애불에서 몇몇 완전한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애불상이 파괴 되지 않은 것은 바위의 단단함으로 파괴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오랜 바위신앙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파괴보다 바위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로 파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남산의 시대별 대표적인 불상은 다음과 같다.
① 고신라 : 불곡 마애여래좌상,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인왕동출토 석조여래좌상,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용장계 출토 석조 불두, 포석계 상사바위 석불입상.
② 통일 전성기 : 칠불암 마애불상군, 입곡 석불두,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③ 통일 후기 :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마애입불상,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용장계 사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침식곡 석조여래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 부엉곡 마애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개선사지 약사여래입상, 창림사지출토 석조비로자나불좌상 2구,
6) 탑파
남산에서는 목탑 1기와 석탑 92기 및 마애탑·천동탑·청동소탑 등 모두 99기에 이르는 탑이 확인되어 당시 신라인들이 남산을 불국토로 생각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평지와 봉우리 곳곳에 탑을 세워 산 전체를 예배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19기만이 제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나,******** 계곡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탑 부재들은 8세기의 전형양식을 시작으로 9세기의 변화된 양식, 그리고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중의 기단과 2개의 탱주가 있고 5단의 옥개 받침 등으로 특정 짓는 8세기의 전형양식은 12기이며, 대부분 계곡의 입구 평지에 그 유적들이 남아있다.
전형양식에서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는 9세기의 탑은 70여기가 확인된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 보이는 자연암반의 기단화는 이 시기 탑 기단부에서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양식은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처럼 괴체형의 기단이 출현되고,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탑곡 삼층석탑, 천룡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등의 단층기단으로 변화되어 간다.
남산동 동 삼층석탑과 용장계 지곡 모전석탑은 모전석탑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며, 창림사지 삼층석탑과 남산동 서 삼층석탑은 상층기단면석에 팔부중상을 배치한 형식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좋은 작품이다.
7) 기타 유물과 유적
남산에는 불교유적과 고고유적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유적·유물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시조 탄강지 나정, 서출지, 월정교와 일정교의 교량지,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포석정지, 최치원의 유허인 상서장, 조선시대 이후의 건축물인 숭덕전, 이요당, 용산서원, 월암종택,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인 매월당사지(梅月堂祠址), 봉수대 및 각종 비석 등이 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255p.
**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삼국유사』 기이 제2 文虎王法敏.
*** 第五十三 神德王 … 火葬 藏骨于箴峴南. 『삼국유사』 [왕력]
王夢 諡曰神德 葬于竹城. 『삼국사기』[신라본기]<신덕왕>
**** 第五十四 景明王 … 火葬皇福寺 散骨于省等仍山西. 『삼국유사』 [왕력]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北. 『삼국사기』[신라본기]<경명왕>
***** 경상북도.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9(신라의 조각과 회화).2016. 133p
****** 칠불암 마애불상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열암곡제1사지 석조여래좌상,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중앙박물관),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좌우 수인이 바뀌어 있다.), 용장계 사곡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침식곡 석조여래좌상, 윤을곡 마애불좌상 2구, 부엉곡 마애여래좌상, 용장계 법당골 석조약사여래좌상(경주박물관), 배실 석조여래좌상(경주박물관), 냉골 석조약사여래좌상(파불),
*******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과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부엉곡 마애여래좌상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해야 될 여지가 있다.
******** 용장사곡 삼층석탑,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삼릉계제6사지 삼층석탑(경주박물관), 승소곡 삼층석탑(경주박물관), 창림사지 삼층석탑, 탑곡 삼층석탑, 천룡사지 삼층석탑, 보리사 삼층석탑,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용장계 지곡 모전석탑,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기암곡제2사지 동 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전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 천관사지 삼층석탑.(복원 정비 순)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55p
4. 유물 유적의 발견과 복원
남산의 유물 유적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선방곡 불당지(佛堂址)에 넘어지고, 엎드려져 있던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을 조사하고 일으켜 세워 정비하였고,* 그해 삼릉계에 목이 결실된 환조(丸彫)의 석불이 앞으로 넘어져 있었고, 광배는 뒤쪽에 떨어져 있었으며, 머리 부분은 훨씬 아래쪽에 떨어져 참담하게 파괴되어 있던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복원한 것이 남산 유적 복원의 시작이었다.**
1922년 용장사 삼층석탑이 도굴범들에 의해 도괴되고, 1923년 삼층연대승형석상도 도굴범들에 의해 도괴된 것을 1924년 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복원하였으며,*** 1935년에는 승소곡 절터에 무너져 흩어져 있던 승소곡 삼층석탑을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해방 이후 발견된 탑과 불상은 다음과 같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 이장수, 이원명에 의해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발견
1979년 시민 오영조에 의해 약수곡 마애입불상의 왼발 찾아 냄.
1988년 시민 김헌덕과 일행에 의해 냉곡 암봉 선각마애여래좌상 발견
1994년 신라문화동인회에 의해 삼릉계 1사지와 폐석조여래입상 발견
1999년 남산 문화유적 전수 조사시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2005년 시민 문종철에 의해 지암곡 선각마애여래입상 발견
2005년 시민 임희숙에 의해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의 머리 발견
2007년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복원과정에서 조사원 박소희에 의해 마애여래입상 발견
2013년 시민 이진락에 의해 헌강 정강왕릉 호석 갑석 발견
2018년 시민 배중선에 의해 국사곡 석탑 갑석 발견
2020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발굴조사로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머리 발견
해방이후 탑과 불상이 발견되면서 탑과 불상의 복원도 큰 성과가 있었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머리와 광배 일부분이 없는 채로 정원에 안치되어 있던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정양모 관장에 의해 머리를 찾게 되어 새로운 박물관으로 이전할 때는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는 큰 경사가 있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1977년 탑곡 삼층석탑이 복원되고, 1979년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복원되었으며, 불교신도들에 의하여 1991년 천룡사지 삼층석탑이 복원되고, 1993년 보리사 삼층석탑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1998년부터 시작된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어 남산의 문화유산이 전수 조사되어, 2002년에 4기, 2003년에 3기, 도합 7기의 탑을 복원한 것은 큰 성과였다.
이로부터 발견되고 복원된 탑과 불상은 다음과 같다.
2002년 용장계지곡 모전석탑,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2003년 기암곡제2사지 동삼층석탑, 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2008년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복원
2008년 열암곡(새갓골) 석조여래좌상 복원
2009년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복원
2025년 헌강 정강왕릉 갑석 및 호석 복원
이들 새로운 유물·유적의 발견은 공공기관의 조사 시 발견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시민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98∼2002년까지 [경주남산 제1차 5개년 정비사업]이 추진되어 구체적인 조사와 정비 계획을 수립할 때도 남산을 잘 알고 있던 향토 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2월부터 [경주남산 세계유산 등재 촉구를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자극을 받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문화재관리국에서 남산의 세계유산 등록을 적극 추진하게 되어 남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으며, 2002년과 2003년에 복원된 7기의 석탑에는 경주 문화시민들의 발원으로 법사리(불상, 필사본 경전, 불화, 향목, 발원문 등의 불구)를 봉안하게 된 것도 큰 성과였으며, 또한 2009년 복원된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천룡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토지매입 조차 어려워 발굴 할 수도 없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큰 성과였다. 이 탑은 복원 당시 한국·스리랑카 불교복지협회의 주선으로 스리랑카 종교부장관과 국회의원(승려)이 친히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봉안하는, 전설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방 이후 불상과 석탑의 조사와 발견, 복원에는 시민들의 공로가 지대하였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관심과 참여가 더욱 활발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 『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44∼245p)
** 『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48p)
*** 『慶州南山の佛蹟』 에 의하면, 삼층석탑은 1922년 도괴되었고, 1923년 가을 복원되었으며, 삼층연화대승형석상은 1923년 봄에 도괴되었고, 그해 가을에 삼층석탑과 함께 다시 세웠다고 하였으나,(『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慶州南山-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60∼261p)), 현장의 명문에는 [三層石塔大正十一年 爲益所倒壞 三層佛塔大正十二年春 爲益所倒壞 小石塔殘部 右大正十三年春再建 朝鮮總督府]로 되어있어, 삼층석탑은 1922년 도괴, 삼륜대좌불은 1923년 도괴, 1924년 봄 복원으로 정리하였다.
5. 남산의 신성성과 아름다움(자연과 어우러진 성지로서의 남산)
남산의 유물 유적의 아름다움은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 편평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반반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조성하고, 높은 봉에는 탑을 세웠다. 절을 세우기 위하여 산을 깎고 골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바위 속에 부처가 머물고 있다고 신앙되어도 바위가 조각을 하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신앙하였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남산은 신들이 머무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남산이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성스러운 분이 본래부터 성스러운 땅을 찾아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남산은 태초부터 성스러운 땅이었다.
또한, 남산신성의 북문에서 1년에 2번이나 농사에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남산신성의 장창이 통일된 왕국의 위세건물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남산이 성소라는 증좌이다.**
남산의 유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속, 바위 속에는 신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곳으로 신앙되었다. 이러한 예는 삼국유사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비파바위의 부처님이 망덕사의 낙성재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행색이 초라한 거사의 모습으로 광주리에 마른 생선을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경흥국사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스님은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린 후 경덕왕에게 「안민가」를 지어 올려 군신과 백성들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 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꾸짖고 가르침을 주시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타나서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를 이루었다.
남산에는 마애불이 많다. 마애불의 시원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처님은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께서는 결가부좌하고 석벽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멀리서 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과 법현의 『불국기』,****** 송운의 『송운행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실려 있다.
또한, 마애불 조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래(古來)로 바위를 영물로 여기는 산악숭배신앙이 보편화되어 왔는데, 그러한 관념은 마애불의 활발한 조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불국토로 생각하였으며, 이곳에 수많은 불교 유적을 남겼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있어 동시에 솟아나시”********는 곳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윤경렬 선생은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후로 남산은 하늘에서 하강하신 부처님들이 머무시는 곳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이 생기고 탑이 서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하였고, 김원룡 선생은 “남산의 석불들을 총관해서 그들이 가지는 공통적 특징은 부처와 자연과의 신묘한 조화에서 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친밀감이라 하겠다. 바위들이 남산과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에 부처도 산의 한 요소로 되어 버린다. 산과 바위와 부처 사이에는 조금도 이질감이 없다. 부처는 산기(山氣)의 구형(具刑)처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산과 함께 시간의 흐름 밖에 서 있다.”**********고 하였으며, 강우방 선생은 “남산에는 불신(佛身)이 편만(遍滿)해 있다. 불신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법계를 남산은 보여주고 있다. 신라인들은 그러한 궁극적인 불교의 진리를 이 남산에 실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문명대 선생은 “남산의 불상들은 바위에 새기고 바위를 쪼아 부처님을 조성하면서 경쟁적으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던 것은 남산 전체를 신라 최고의 영험도량으로 인식하였던 신라인들의 의식 때문이었다. 산 전체가 영험도량 이었으므로 산과 부처님, 탑과 산이 혼연일체로 조화되게 배려하고 있다. 부처님과 산이 하나로 융화되었다. 신라인들은 남산을 부처님으로 그들의 의식 깊숙이서 부터 생각했다.”************고 하였다.
남산은 불상과 탑, 바위, 나무들이 어우러진 불국토를 이루었다. 남산에서 널리 알려진 자연과 어우러진 탑상들은 다음과 같다.
① 불곡 마애여래좌상 - 석굴 사원의 시원양식이며, 석실 속에서 편안히 쉬는 듯한 할머니 같은 인자한 모습.
②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 삼륜대좌로 된 특이한 모습의 8세기 조각으로 하대석은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으므로 바위산(수미산)에서 솟은 듯 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③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 절벽 위의 바위에 조성된 미륵보살상으로, 구름 위에 유희좌로 앉아 오른손에는 용화수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설법인을 하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시는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④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 8세기 후반의 불상으로 하대석에 연화대를 생략하고 거칠게 조각함으로서 바위 능선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입상 - 9세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으로, 광배 등 일부 조각을 생략함으로써 하늘에서 하강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⑥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 선각으로 조성되어 바위와 잘 어우러져 벽화 같은 9세기에 조성된 조각이다.
⑦ 보리사 마애석불 - 예참조차 어려운 가파른 비탈에 노천불로 조성되어, 서라벌을 굽어보는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다.
⑧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 9세기에 거대한 바위를 불신(佛身)으로 삼아 조성한 마애불이다.
⑨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9세기에 조성된 마애불로, 머리는 고부조로 깊이 있게 조각하여 입체감을 강조하고, 편평한 신체에는 옷 주름과 손·발 등을 거친 선각으로 표현하여 마치 바위에서 돌출하는 듯한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⑩ 용장사곡 삼층석탑 - 산 능선의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세운 석탑으로,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산봉우리의 거대한 바위 위에 솟아 수미산처럼 보인다. 남산의 망탑 가운데서 그 아름다움이 으뜸이다.
⑪ 국사곡제4사지 삼층석탑 - 산 중턱 바위 위에 세워진 단층기단의 삼층석탑으로, 망탑의 성격을 지닌 삼층석탑이다.
⑫ 비파곡제2사지 삼층석탑 - 기단을 거칠게 치석한 망탑으로 가암들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며, 들판에서 올려보면 바위산에서 솟아 오른 모습의 탑이다.
⑬ 지암곡제3사지 삼층석탑 - 다듬지 않은 바위를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이다.
⑭ 포석곡제6사지 오층석탑 - 바위 봉우리를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으로 서라벌이 굽어보인다.
⑮ 삼릉계제6사지 삼층석탑 - 바위 지반을 기단으로 이용한 망탑 형식의 삼층석탑이다.
* 十二月寅日 新城北門祭八䄍 豊年用大牢 凶年用小牢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祭中農 立秋後亥日 䔉園祭後農. 『삼국사기』 잡지 제사.
**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삼국유사』 기이 제2 文虎王法敏.
장창의 용도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군량미와 병기를 저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규모나 출토되는 유물(와당 등)과 위치상 군사시설이 될 수 없다. 이는 통일된 왕국의 위세 건물로 봄이 타당하다. 또한 혜공왕 4년(768) 각간 대공의 반란 중 신성의 장창이 불에 탓다는 기록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 『삼국유사』 감통제7 眞身受供
**** 『삼국유사』 감통제7 憬興遇聖
***** 『삼국유사』 기이제2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연되는 곳에 석실이 있는데, 산을 뚫어서 남서로 방향을 틀고 자리 잡고서 붓다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10여 보 물러서서 바라보면 붓다의 진짜 형상을 보는 것과 같고 금색상호는 빛나며 뚜렷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점점 희미해지나 그래도 그림자는 있는 것 같다. 여러 곳의 왕들은 각기 그림쟁이를 보내서 묘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림자의 실물과 같이 그릴 수는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전하기를 “천불은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긴다.”고 한다.
那竭城南半由延有石室博山 西南向佛留影 此中去十餘步觀之如佛眞形 金色相好光明炳著 轉近轉微髣髴如有 諸方國王遣工畫師摹寫莫能及 彼國人傳云 千佛盡當於此留影. 『佛國記』 김규현, 글로벌콘텐츠. 2013. p77∼78, p187.
******* 이태호. 「한국마애불의 유형과 변모」. 불교문화연구7. 2000.
******** 佛說是時 娑婆世界 三千大千國土 地皆震裂 而於其中 有無量千萬億 菩薩摩訶薩 同時湧出 是諸菩薩 身皆金色 三十二相 無量光明 先盡在此 娑婆世界之下 此界虛空中住. 『묘법연화경』 從地湧出品 第十五
부처님께옵서 이렇게 설하실 때에 사바세계와 삼천대천국토는 땅이 다 진동하고 벌어지나니, 그 가운데서 헤아릴 수도 없는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있어 동시에 솟아나시니라. 이 모든 보살의 몸은 다 금색이시고 삼십이상이며 무량한 광명이라 먼저 다 이 사바세계 아래 이 세계의 허공중에 머물러 있나니.
********* 윤경렬.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 불지사. 1993. 21p.
********** 열화당. 『慶州南山-新羅淨土의 佛像』. 1987. 18p
*********** 열화당. 『慶州南山-新羅淨土의 佛像』. 1987. 196p
************ 문명대. 『慶州南山佛像實測調査硏究』. 한국미술사연구소. 1989.
6. 마무리
남산은 단순한 자연 경관을 넘어, 신라 왕실과 백성들이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성스러운 터전이었다. 이 곳에 남겨진 다양한 불교 유적들은 신라인들의 신앙과 세계관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인들은 불국토 사상을 바탕으로 남산을 신성한 공간으로 가꾸었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남산의 유적들은 신라의 정신세계와 문화적 성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신라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산은 단순한 역사적 장소를 넘어, 신라 불교의 정수가 깃든 신성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산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개별 문화유산과 미술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앞으로는 신앙 차원의 연구와 함께, 신라인들이 남산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심화된 고찰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남산의 유적과 유물은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복원되어야 한다. 남산의 문화유산은 본래의 자리에서 자연과 어우러질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 일찍이 『慶州南山の佛蹟』을 집필한 오바 쓰네키치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이후 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된 삼릉계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본래 위치를 벗어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반드시 원위치로 돌아와야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이처럼 남산을 떠난 수많은 문화유산은 하루 빨리 남산으로 돌아와야 하며, 돌아오기가 어렵다면 현장에서 옛 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산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 그리고 새로운 유산의 발견 등은 국가기관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남산의 보전 및 조사와 유물의 발견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큰 성과를 이룬 것처럼, 앞으로도 시민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 드립니다.
* 이 석불과 같이 낭떠러지에 몸을 의지하고 겨우 올라가는 절벽사이의 좁은 곳에 큰 바위를 파고 깎아 교묘하게 거대한 불상을 만들고, 매일 예배한 신라인의 신앙을 단순히 불교를 숭배한 것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佛殿佛像 제작은 본래 미술품으로서 만들고 또한 조각한 것이 아니고 심오한 佛敎敎儀의 표현으로서 특별히 산 속에 깨끗한 곳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 불상도 현재와 같이 박물관의 한 미술품으로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원위치의 환경과 서로 어울림에 의해 비로소 중요한 뜻과 靈威를 내포하는 것으로 남산 계곡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慶州南山の佛蹟』 1940. 朝鮮總督府. (『慶州南山』.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51p)
참고문헌
『묘법연화경』
『삼국사기』
『삼국유사』
『불국기』
조선총독부.『慶州南山の佛蹟』. 1940.
열화당. 『경주남산-신라정토의 불상』. 1987.
한국미술사연구소. 『경주남산불상실측조사연구』.1989.
윤경렬.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 불지사. 1993.
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경주남산』.199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탑 및 탑재 조사보고서』.199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Ⅱ-서남산 사지조사보고서』.199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의 불교유적Ⅲ-동남산 사지조사보고서』.199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도판편』. 2000.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남산-본문·해설편』. 200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 2004.
경주시. 『경주 남산신성』. 2010.
경상북도.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9(신라의 조각과 회화). 2016. 122∼153p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2020.
2025. 6. 13.